1. 조지 발란신
미국의 발레계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친 디아길레프의 안무단 중의 한 사람이 발란신 이었다.
그는 피터스버그에서 태어나 10세에 왕립 발레 학교에 입학해서 1921년에 졸업을 한 이후 당시에 레닌그라드에 있던
소집단의 젊은 댄서들과 함께 다수의 실험작품을 안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 대해 많은 반대가 있었으며
1924년에 발란신은 소비에트 스테이트 댄서들이라고 할려진 소집단의 젊은 예술가들과 함께 독일로 떠날수 있는 허락을 얻었다.
파리로 가는 여행길에 그들은 디아길레프에게 연기 테스트를 받고 디아길레프 발레단에 흡수되었다. 20세에 발란신은 니진스카를 대신하여 발레 마스터가 되었다. 발레 마스터가 된 발란신은 10개의 신작들을 창작하고 그 밖의 수 많은 작품들을 재 상연하여 몬테카를로 에서 오페라 시즌 동안에 발레곡들을 제작하면서 4년 반동안 디아길레프를 위하여 종사했던 것이다. 디아길레프가 죽자 그의 발레단원들은 산산히 흩어졌다.
디아길레프와 함께 일하던 시기에 발란신은 완전히 성숙한 안무가가 되었지만 1927년에 심한 무릎의 상해로 인하여 더 이상 부담이 가는 역할의 춤을 출 수가 없었다. 발란신이 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의 두 작품, 아폴로와 방탕한 아들은 대단한 관심을 일으켰지만 그 이상 대단한 명성은 얻지 못했다. 발란신은 베토벤의 음악에 맞춘 2막짜리 작품 프로메테우스를 새롭게 각색하여 상연 하기 위하여 파리 오페라에 초청되었으나 결핵에 걸려 갈 수가 없었다. 수 개월 후 병은 회복되었으나 파리에서의 일은 사라져 버렸다. 그 이후로 발란신에 있어서는 의지할 데 없는 시기였다. 그는 파리와 런던에서 레뷔의 소발레와 오락거리를 꾸몄으며 1930년과 또 1931년에 코펜하겐에 있는 로얄 대니쉬 발레단을 위하여 초청 발레 지휘자로 일을 하였다. 그리고 몬테 카를로 에서 레네블륌의 지휘하에 있는 새 발레단을 위하여 발레 맘스터로 활약하였지만 콜로넬 드 바씰르와는 마음이 맞지 않았기 때문에 레오니드 마신느에게 자리를 물료주고 1933년에 파리의 샹젤리제에서 레발레를 조직하였다. 그 후 부유하고 젊은 미국인 링컨 커스타인의 초청을 받았는데 커스타인은 에드워드 와르버그의 협력을 얻어 미국의 발레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테이퍼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그는 몇몇의 러시아인을 보유한 것과,,, 이곳에 순회공연을 하기위해 오는 발레단만으로 만족치 못했다. 그 보다는 발레단, 발레의 레파토리 및 발레의 관객을 확립하므로서 발레가 미국에서 생명력이 넘치는 고유한 예술로서 뿌리를 내리고, 미국에 알맞게 하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이러한 생각은 루이14세가 맨 처음 발레단을 윤허한 이후 300여년 동안에 단지 서너차례 성공했을뿐이다. 그리고 매 시기마다 그 것을 이루기 위하여 군주들은 어마어마한 돈을 썼던 것이다. 또 그때마다 발레의 전통이 깊은 나라에서 그 예술을 가져온 위대한 발레마스터의 스타일에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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