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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 이야기

발레의 혁신기

by limiggg 2023. 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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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셸 포킨 


 세인트 피츠버그에서 태어났고 1889년에 왕립 발레학교에 입학한 미셸 포킨느는 9년 후에 솔리스트로서 마린스키 극장 발레단에 입단하였다. 그는 뛰어난 무용수였으나 나중에는 '주역 댄서' 라기보다는 안무가와 교사로 알려지게 되었다. 러시아 발레의 경직성과 예술성의 빈곤으로 상당히 방해받은 포킨느는 러시아의 춤은 민첩성과 신체적인 묘기의 과시에 불과하다고 논평하면서 초년기의 전형적인 파드되의 본질을 묘사하였다.
그러나 다음과 같이 의식적인 안무는 거의 없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것이라고 느낀 것은 무엇이든지 했다. 나는 하이 점프와 파브로바삐루엣을 했다. 각 '일련번호'와 그것이 삽입된 발레사이에는 어느 것이든지 관련이 없었다, 또 어떠한 음악과도 관련이 없었다. 우리는 음악이 시작할 때 아다지오를 시작했고 음악이 끝날 때 끝냈다. ]
포킨은 학생들의 연기와 안무를 가르치고 책임지기 시작했으며 1904년에는 그의 철학을 처음으로 나타낸 바레 '다프니스와 클리'에 대한 계획을 제출했다. 그것은 의미 있는 극적 사업으로서 발레의 주요소를 융합할 필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노베르의 것과 매우 흡사했다. 이 계획은 좌절되었으나 3년 후에 두 명의 뛰어난 젊은 연기자 바비옹 다르미드 가 제작되었다. 그러나 포킨느는 그의 개혁안을 실행에 옮길 기회를 거의 가지지 못했다. 대표적인 예로써 그리스 무용의 역할을 맡은 댄서들에게 맨발로 춤을 추도록 시도하였을 때에 전통의 힘이 너무 강하여 그는 어쩔 수 없이 무희들에게 분홍색 타이츠를 신겨야만 했다.
 그 후 포킨은 러시아를 방문 중이던 이사도라 덩컨에게 감명받았고, 러시아 무용단이 몇몇 발레 작품을 공연하기 위하여 단장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와 함께 파리로 여행할 기회가 왔을 때에 그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1909년에서 1914년까지 포킨느가 안무가로서 급속도로 성장한 곳은 바로 파리에서였다. 이 기간 동안 포킨느는 안무가로서 급속도로 성장한 곳은 바로 파리에서 였다. 이 기간 동안 포킨느는 많은 대작들을 상연하였는데 대작 중에는 '이고르 왕자' '공기의 정' '까르나발' '불새' '장미의 정' 등이 있으며 이중 에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상연되는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포킨이 발레에 대한 철학이 성숙한 곳도 역시 파리였다. 1914년 더 런던 타임스에서 보낸 그 유명한 편지에서 포킨의 견해가 완전히 표명되었는데 그 글에서 그는 발레의 안무와 제작을 지배하는 5가지 주요 원칙을 대략 설명하였다.

 


 2. 포킨의 안무 주요 원칙 

 


 첫째-각 무용은 고전적 전통으로부터 나온 일관된 진부한 동작을 사용하기보다는 발레의 주제, 시기, 나라에 알맞고 음악에 적합한 새로운 형태의 동작을 창조할 필요가 있다.
둘째- 발레의 극적인 장면은 서술적인 중요성이 없는 무용곡을 대체하여 이야기를 연결하기 보다는 동작에 의하여 계속 전개되어야 한다.
셋째-전통적인 몸짓언어나 종종 관객들이 이해하기 어렵거나, 심지어는 댄서들조차 이해하기 어려운 무언극을 그만두어야 한다. 그 대신 생각과 감정을 전달하기 위하여 댄서는 온몸을 사용해야만 한다.
넷째-댄서들의 전 그룹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장식적인 중간극을 제공하는 군무로서가 아니라 발레의 테마를 전개하기 위하여 이용되어야 하며 플롯의 일부분이 되어야 한다.
다섯째-발레는 발레 안에 포함된 모든 예술의 적극적이고 동등한 협력을 반영시켜야 한다. 즉 그 예술들이란 음악, 무대장치, 무용, 의상 등이며 이것은 통일된 창조적 노력에 대하여 중대한 것이다. 특히 음악은 더 이상 분리되고 관계가 없는 곡들의 연속이어서는 안 되며 극적으로 플롯에 융화된 하나의 통일된 구성이 되어야 한다.

 포킨의 관심은 발레가 생활을 반영하는 완전히 표현적 예슐이 되게 하는 데 있었기 때문에 당시에 그의 사상은 혁신적이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의 사상은 성공적이어서 파리의 관객들은 몹시 열광적이었는데 그 이유는 프랑스의 발레가 너무 활기가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전에는 무대 위에서 본 적이 없는 동작을 사용하고 진실한 성격묘사를 위하여 과거의 안무와 무용의 융통성이 없는 관례를 무시하면서 포킨느가 다채롭고, 역동적인 발레를 하며 무대 위에 나타날 때 관중들은 열광하였다. 포킨은 그들이 흥분하는 모습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플로베츠니언 댄스가 끝난 후에 관객들은 채터릿 극장 앞으로 몰려들어 오케스트라의 난간대를 부수었다, 아주 믿지 못할 정도로 성공하였다 ]
 드, 미는 파리에서 이 시기의 수년간 그리고 세계 1차대전 중 영국에서 4년간 발레가 멋진 극장 예술의 중요한 형태가 되었다고 언급하였다. 포킨은 장소와 시대에 맞게 안무하였고, 음악 역시 이러한 요소들에 아주 일치되게 하였으며 춤의 스타일과 연기의 매너는 이전의 형태에서 아주 탈피한 것이었다. 고전적인 테크닉은 보다 자유롭게 풍부한 팔과 다리의 동작 및 유연한 모습으로 발전되었다. 즉 전에 취하던 머리와 팔의 딱딱한 자세는 이제 느슨해졌으며 동작은 일반적으로 보다 자유롭게 물 흐르듯 하며 감정표현도 풍부하여졌다. 그리고 이들 신 작품들에서는 구식의 고전 의상들을 기피하는 대신 시기와 플롯에 알맞게 하였다. 1912년에 디아길레프는 안무가를 니진스키로 대체하였다. 비록 그 극단을 위해서 몇몇 발레 작품의 창작은 계속하였으나 포킨은 1914년에 그곳을 떠나 그때부터 코펜하겐, 파리,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는 오페라 발레단과 가끔 일했다. 그리고 뉴욕에서 자신의 발레단을 가지고 활동하였던 포킨은 1942년 미국에서 사망하였다.
 포킨은 창조적 능력에 있어서 절정을 이루었으며 계속하여 자기 자신의 뛰어난 발레곡을 안무하기 위하여 주요 발레단들과는 관계를 맺지 않았었다. 이것에 대한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디아길레프에 대해서 약간 알 필요가 있다. 

<출처- 세계무용사 , 금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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