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발레의 역사
14세기경 이탈리아는 르네상스 시대라고 불립니다.
르 – 다시, 네상서- 탄생이라는 뜻인데요 사람들의 관심이 ‘신’에게서
‘인간’에게로 이동하는 새로운 시대였습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기분을 즐겁게 해주는 예술에 관해 관심이 높아지게 되었습니다.
발레의 어원은 이탈리아어 ‘ ball are’로 춤을 춘다는 뜻입니다.
처음 발레는 왕궁의 사교춤으로 시작했습니다.
정치적안전과 경제적 풍요를 통해 마음의 안정을 얻은 귀족들은 노동하지 않아도
생활의 걱정이 없게 되자 그 시간을 예술 활동으로 채우게 된 것이죠
처음에 무용은 그저 귀족들이 의상을 뽐내며 무대를 돌아다니는 수준으로 가장행렬에 더
가까웠습니다. 회전, 자리 바꾸기, 제자리에서 돌기 같은 간단한 스텝들 (바 그 당연한 이야기)라 부리는 춤이 훗날에 안무가들이 발전시켰고 이것이 발레의 모태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탈리아어에서 시작한 발레의 용어가 왜 모두 프랑스어일까요?
이탈리아 귀족사회에서 유행하던 발레는 1553년 14살에 프랑스 왕궁으로 시집간 카트린 왕비에 의해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의 카트린 왕비는 어릴 때부터 여러 가지 문화에 관심이 많아서 이탈리아 발레 음악가를 프랑스로 데려와 큰 비용을 들여 발레 공연을 무대에 올리면서 발레를 전폭적으로 지원했습니다. 그렇게 1581년 최초의 공식적인 발레; 여왕의 발레를‘ 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이 형식은 약 100년 동안 유행하다가 ’ 극장‘ 이라는 것이 생겨나면서 왕궁이 아닌 대중들도 볼 수 있는 예술 형태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오늘날 같은 발레 공연은 아니었습니다. 오페라나 연극 안에 있는 극 속의 발레로 발전하였지요
여기서 한 가지 놀라운 점은 카트린 왕비가 발레를 후원한 이유입니다.
순수한 마음보다는 오히려 정치적인 계산이 강했다고 합니다.
발레 작품을 통해 그 스토리를 그녀가 생각하고 있는 왕궁 내부의 권력 다툼을 드러내거나 왕의 절대적인 권위를 나타내면서 암암리에 무의식중에 사람들에게 그녀의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했다고 합니다. 이 시기에 우리가 널리 쓰고 있는 ‘ 발레’라는 용어도 생겼지요.
그 후로 1717년 최초로 연극과 오페라에서 떨어져 나온 최초의 무언극 발레인; 마르스와 비너스‘ 라는 작품이 영국인 존 위버에 의해 탄생합니다. 이를 1760년 노벨이라는 사람이 ’무용과 발레에 대한 편지‘에서 공식적으로 문건화되면서 비로소 발레는 독립된 예술로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발레의 기틀이 잡히면서 발레 용어 들은 영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구성되었고, 그 용어들은 지금까지도 세계 어디에서나 동일하게 사용되게 된 것입니다.
2. 태양왕 루이 14세
최고의 발레 애호가로 꼽히는 그는 5살에 즉위한 이래 늘 불안정한 정치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전쟁의 후유증과 귀족들이 합세한 난 속에서 성장한 그는 보다 더 강력한 왕권의 확립을 원했습니다.
절대왕정의 군주로서 정치적 입지를 강화 하는 수단으로 발레를 선택했습니다. 발레의 주인공 영웅들은 하늘을 나는 마차를 타고 천장에서 내려오거나 파도 속에서 솟아나거나 당이 갈라지면서 위풍당당하게 등장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발레를 이용해 자신의 권력을 어필한 것이지요.
“짐이 국가다”라고 외쳤던 프랑스 절대왕권의 상징이자 전쟁광으로까지 일컬어지는 전제군주가 발레 스타라니 모순적이긴 하지만 사실입니다. 루이 14세는 수십편의 발레에 출연한 스타였음은 물론이고, 세계 최초의 발레학교를 세우고 발레의 사회적 지위를 끌어올린 발레중흥의 일등 공신입니다. “태양왕”이라는 작품을 통해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황금빛으로 치장하고 의상과 장신구로 꾸며 나타났는데 발레는 성공적이었고 자신도 이 배역을 흡족히 여겨 이때부터 태양왕이라는 별칭을 얻게 됩니다. 본인을 중심으로 군무라 원을 그리며 돌아가거나 자신을 중심으로 많은 군무에 무용수들이 머리를 숙여 인사하는 장면들을 통해 왕실은 왕국이 돌아가는 축이자 태양임을 귀족들에게 각인시키고자 한 것이며 단지 지상의 신인 프랑스 왕이 아니라 만물에 빛을 비추는 우주적인 존재로의 위용을 과시했습니다. 그 의도는 아주 성공적이었습니다. 이때 그의 나이는 15살 되는 해였습니다. 루이 14세의 열정과 애정으로 프랑스 발레는 큰 발전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 모든 예술은 오로지 왕의 권위를 높이는 도구이자 수단이라고 여겨졌습니다. 루이 14세가 춤에 한창 빠져 있을 때는 일주일에 서너 차례 발레에 출연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국정은 언제 돌보았는지 걱정이 안 되는 건 아니나 어쨌든 절대권력을 휘두르던 황제가 발레에 큰 애정이 있어 발레의 사회적 지위가 상당히 향상됐음은 물론이고 발레를 구성하고 가르치는 일부 인사들이 개인적인 영화를 누리기도 했죠. 당시 황제의 시종 중 가장 많은 급료를 받은 사람이 최초의 무용 교사이자 루이 14세의 선생이었던 ‘ 피에르 보샹’이었다는 사실도 그런 예의 하나입니다. 보샹은 바로 오늘날까지도 준수되고 있는 발레의 다섯 가지 기본 발 위치를 정리한 사람 입이다. 하여튼 이 당시는 춤을 잘 추면 돈과 권력이 따랐는데요 지금 시대로 치면 골프와 비슷한 맥락인 것 같습니다.
루이 14세는 삼십 대에 들어 발레 출연에 시큰둥해졌습니다. 일부는 뚱뚱해져서라고도 하지만 자신의 지나친 스타 의식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자 심기가 불편해졌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리고 그 시기 루이 14세는 군사력을 장악한 시기입니다. 왕이 춤추기를 그만두자 많은 귀족도 함께 은퇴하였고 고급댄서들을 잃었으나 발레에 대한 애정은 우직했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제대로 된 경쟁이 시작되었고 자신이 출연하기보다 발레 발전에 도움이 되는 획기적인 초석들을 놓기 시작했습니다. 또 이때 뚱뚱하고 돈 많은 무용수들은 이 즐거운 유희를 포기하지 않고 후원자가 되었으며 관객의 자리로 옮겨가 비로소 귀족들이 추는 춤에서 보는 춤으로 바뀌는 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루이 14세는 1661년 발레학교의 효시하라고 할 수 있는 왕립무용아카데미를 설립합니다. 발레의 과학적 원리를 정리하고 교육의 질을 개선하며 공연에 출연할 무용수들을 훈련하는 일까지 한 이 아카데미는 발레가 지배계급의 여흥에서 전문가의 예술 장르로 발전하는 중요한계기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세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현재의 국립 음악 무용 아카데미 즉 파리 오페라 발레학교 및 발레단의 모태가 됩니다.
이 아카데미 설립으로 맞추어 무용수들의 발레시다는 막을 내립니다.
<출처 - 발레이야기, 이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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