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바슬라브 니진스키
니진스키는 그의 무용 경력이 겨우 9년에 불과하며 1914년부터 1916년사이의 2년간은 거의 춤을 추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가장 위대했던 남성 발레 댄서로 평가되고 있다.
폴란드인의 혈통을 가지고 1890년에 우크라이나에서 출생한 니진스키는 피터스버그의 왕립 발레학교에 나갔으며 거기에서 뛰어난 연기자로 평가받았다. 1908년 졸업한 직후 포킨의 작품 돈쥬앙 에서 데뷔하였으며 니진스키의 첫번째 무대를 가지기 위하여 파리에 가자는 디아길레프의 제의를 수락하였다. 니진스키는 포킨의 서너가지 발레작품에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 후 2년뒤 1911년 디아길레프 발레단의 영구적인 멤버가 되기 위하여 피터스버그단을 정식으로 사퇴하였고 거기에서 "장미의정"과 "빼트루쉬카"와 같은 무용의 대역으로 춤추면서 1913년까지 계속해서 제1 무용수로 지냈다.
니진스키는 그의 결혼에 단장이 화를 내어 잠시 디아길레프단을 떠났었지만 미국의 순회공연을 하기위해 1916년에 다시 돌아와서 곧 남아메리카에서 공연을 하였다. 그러나 니진스키는 정신병을 앓게되어 여생을 요양소에서 보내는 비참한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따.
그러면 니진스키의 전설에 대한 근거는 무엇이었는가?
첫째로 그것은 그의 고전 댄서로서의 위대한 능력에서 비롯된다.
그는 대단한 테크닉, 엘리베이션, 립 동작 및 삐루엣 으로 유명하였다. 따라서 니진스키는 가장 위대한 도약자로 믿어졌으며 앙트르샤 두즈 공중에서 발을 완전하게 6번 교차시킴을 해낼수 있었다. 따라서 순수한 무용의 뛰어난 재기의 음미에서 볼때 그는 명성을 얻을만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니진스키는 클래식 댄서만은 아니었다. 그는 1920년대 초기의 현대무용가들과 유사한 방법으로 동작의 가능성을 탐구하였으며 네개의 작품을 창조한 탁월한 안무가였다. 니진스키의 작품은 목신의 오후, 르 사크르 뒤 프렝탕, 죄 및 틸 율렌스피젤인데 이 가운데 처음 두가지는 전통적인 동작을 철저히 타파하고 무대위에서 성 행위의 너무 솔직한 묘사로 인하여 거센 물의를 일으켰다. 니진스키는 자기 자신의 작품 및 포킨의 배역중에서 무대위에서 일전에 볼수 없었떤 몇가지 동작을 창조하였다.
[긴장, 뻗침, 엘리베이션, 외향 동작대신에 니진스키는 이완 , 허그 드 인 쉬버즈, 져키 쉐이크스, 서브휴먼 바이브레이션 및 내향 무기 같은 것을 써서 야릇하고 추하며 야성적이고 강열함을 이용하였으며]
그러나 니진스키는 자신의 가장 실험적인 작품에서 조차 클래식 발레의 기법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그의 고도로 독특한 안무는 고도로 훈련된 예술가에 의해서만이 연출될 수 있으며 당시 데꼴에서 훈련받은 기능에 기초를 두고있는데 만약에 그의 생애가 그렇게 비극적으로 단명하지 않았더라면 무용계에 미치게 되었을 그의 공헌은 예측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2. 안나 파블로바
이와 대비되는 역할을 한 사람은 안나 파블로바였다.
니진스키와 마찬가지로 그녀의 명성은 발레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댄서로서 전설적이었으며 오늘날의 발레리나와 그녀의 능력을 정확하게 비교한다는 것은 매우 힘들다. 파블로바는 1881년에 태어나 소녀때 마린스키 극장의 왕립학교에서 공부하였고 피터스버그에서 십년간 주연을 맡았으며 아돌프 볼름과 함께 1905년에 스칸디나비아를 순회하였다. 따라서 러시아밖에서 공연을 한 첫번째의 위대한 러시아의 발레리나가 되었다. 1909년에 파리에서 디아길레프아 합류했으나 그를 떠나 미카일 모르드킨과 자신의 발레단을 형성하여 그녀가 죽을 때 까지 20년 동안 전세계 방방곡곡을 독자적으로 순회공연 하였던 것이다. 수 백만의 사람들에게 파블로바는 발레의 화신이었다. 츄조이는 그녀가 러시아및 서부유럽의 극장가와 오페라하우스에서 귀족적이며 왕실의 예술이었던 것을 취급했으며 그것을 미국 방방곡곡의 일반시민들에게 보였다고 논평하고 있다.
파블로바는 무대와 뮤직홀, 고등학교 강당 및 극장가에서 자신의 위대한 예술을 연기하여 이전에 소수의 특정인에게 속해있던 예술의 형태를 많은 사람들에게 유용하게 하였다. 따라서 사람들의 발레에 대한 이해, 감상 및 사유의 능력을 고양시켰다.
특히 미국에서는 파블로바의 영향력은 지대하였다. 엘슬러가 발레의 황금시대에 한거소가 같이 그녀는 1912년에서 1925년 사이에거의 매년 전국 방방곡곡을 순회공연을 하며 대단한 갈채를 받았던 것이다. 파블로바 덕택에 한 세대의 미국인들이 발레를 위대한 예술로 여기게 되었으며 그들이 본 것은 혁신적인 안무라던가 니진스키의 무용과 같은 것은 전혀 아니었다. 그 대신에 파블로바는 보수적이며 전통적인 댄서였다. 순회공연중에 행한 그녀의 연기는 풀스케일 발레는 아니었지만 일류급 남녀파트너와 함께 그녀 자신이 주연을 한 작은 발레단을 가지고 있었다.
파블로바의 무용 그 자체는 무용의 우아함, 경쾌함 천부적인 노력의 부재로 특정지어졌다. 그녀는 스타일의 선명한 감각에 의해서 진지하고 세련되었으며 뛰어났다. 그리고 시적 동작에 대하여 순수하고 깊은 존경심을 느끼게 한다.
디아길레프 시대의 다른 지도적인 인물로써 레오니드 마신느, 브로니슬라바 니진스카, 및 조지발란신 등이 있다.
<출처- 세계무용사 , 금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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