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예술의 의의 2
중세의 미학적 사상은 그 당시 사회적 사상과 같이 신학에 녹아들어 있었다. 오로지 르네상스시대에서만 알베티와 다빈치와 같이 인문학적인 교육을 받은 예술가들로 하여금 예술에 대한 비종교적이고 이론적인 생각의 실체를 발전케 한다.
르네상스 예술가들의 글은 주로 미술 작품과 관련되어 있었으니, 그들은 원근화법의 그림으로써 예술적 디자인의 특징을 성문화하고 합리화하려고 했으며, 미술실습의 수작업적인 면을 넘어서 이론적이고 과학적인 점을 강조함으로써 생산자인 예술가의 지위를 높이고자 했다. 르네상스예술가들의 주장은 지오토에서의 단초로부터 미켈란젤로에서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이탈리아 미술의 발전을 전해주는 일련의 전기인 바사리의 [미술가 열전]으로 편찬되었다.
[미술가 열전]의 구성요소들이 후기 미술사학자를 위해 중요한 모델을 제공한 한편, 바사리가 1563년에 피렌체에 설립한 디자인 아카데미는 쇠퇴하고 있는 교회의 문화적 독점을 대신하여 문화 작품에 대한 중앙 집권화된 관리를 확립하려는 전제주의 국가를 발전시키기 위해 완전하게 조직화된 모델을 제공하였다. 프랑스에서는 1619년부터 1690년까지 미술아카데미의 교장 르 브륀 이 도자기와 직물제조를 위한 정부작업실을 위해 디자인을 지도했고, 그 안에서 작품을 관리했다.
이런식으로 국가에 독특하고 통일성 있는 고급문화가 제공되었다. 아카데미 내부에서는 예술가 양성의 중심적인 임무가 일련의 회이화 강의에 의해 수행되었는데, 여기에서 고전주의 전통 대가들의 작품이 당시 미술의 본보기를 확립하기 위해 논의되고, 분석되고, 평가되었다. 문학에서의 고전주의 교설과 같이, 미술에서도 아카데믹한 정통적 관행은 표정이나 몸짓의 표현, 선과 색의 사용에 대해 계산할 수 있는 방법을 따르면서 예술작품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려고 하였다. 그렇게 신중히 계산된 그림의 효과는 감상자 일부의 특정한 반응들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그리고 감상자들이 역사적 그림들에 묘사된 영웅의 행위를 따르도록 하기 위해 설계되었으며, 이렇게 해서 감상자들을 새로운 절대군주국가 아래 세워진 규범적 가치로 통제하려고 하였다. 이런 아카데믹한 구조의 상황에서, 그리고 17세기에 반동종교개혁이 속도를 더함으로써 종교적 후원이 다시 생기는 상황에서, 예술 경험은 여전히 신자들의 종교적인 품성 양성과 사회 엘리트들의 궁정생활 양식 순응 안에 묻혀있었다. 미술을 보고 그것에 관해 아는 것은 전문지식에 의한 특별한 활동이 아니라, 세련된 궁정사람들의 일상적인 문화의 한 부분이었다.
이처럼 한편으로는 예술의 제작과 수용이 여전히 사회적으로 끼워 넣어졌다. 다시 말해, 교회와 정부와 같은 본질적으로 비예술적인 단체와 관심들에 의해 지배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의를 통해 이루어진 예술기준에 대한 공개 토론은 특정한 논쟁에 관련해 정통의 아카데믹한 입장을 확립하기 위해 투표를 실시하면서 자율성에서 실질적인 쟁취를 보여주었다. 그런 수단들은 예술작품을 전통적인 기준으로부터 해방시켰고, 반동종교개혁 시대에는 이를 예술 후원을 통한 독점적인 지배를 반복하려는 시도로부터 보호했다. 게다가, 최종에는 이미 확립된 사회적 기준을 더욱 효과적으로 가르치려고 하는 욕구가 미술의 합리화를 이끌었다 하더라도, 예술은 정해진 것이라고 믿는 궁정과 교회에서 벗어나 있는 형식적 제도적 맥락 안에서 그림에 대해 토론하고 분석하는 훈련은 예술의 본유적인 미학적 가치, 그리고 특히 개인적이고 지역적인 스타일에 대한 미학적 가치의 자율을 위한 여론을 크게 조성했다.
아카데믹한 개념들이 매우 부분적으로만 제도화되거나, 혹은 전혀 제도화되지 않은 영국과 독일의 많은 지역에서는 예술적 집필과 예술적 경험이 한발 앞서 전통적인 제도적 상황에서 빠져 나왔으며, 예술의 감상과 평가가 그들 자신의 권리 안에서 보장되는 전문화된 행동으로 성립되는 새로운 독립적인 체제가 만들어졌다. 1688년의 명예혁명에서 의회가 승리한 이후, 영국 군주의 전제주의에 대한 어떠한 열망도 사실상 제거되었고, 궁정은 예술 후원가로서의 주요 임무 수행도 멈추었다. 게다가 청교도 주의는 유럽 가톨릭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종교적 예술의 수요를 엄청나게 감소시켰다. 이에 예술작품은 점점 시장으로 향했고, 귀족들과 상업적 엘리트의 부유한 성원들로 이루어진 수집가들에게 팔려갔다. 시골에서나 런던의 가정에서나 그런 수집은 주로 아카데믹한 예술 저서에 의해 매겨진 양식적이고 역사적인 가치 기준에 따라 이루어졌다. 이는 예전 귀족 계급의 특색인 조상의 초상화 전시의 전형적인 기능을 바꾸어 놓았다.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경험해 왔던 종교적, 정치적 상황에서 벗어나 소장품으로나 경매로, 예술작품들을 마주했다. 플아스에서는 1년에 한번 씩 살롱에서 열리는 아카데믹한 미술전시가 비슷한 종류의 경험 기회를 제공했고, 이는 디드로가 그의 예술비평을 발전시키는 하나의 틀이 되었다. 그런 예술 비평 작업은 새로운 환경 안에서 예술을 대하고 반응하는 안내서가 필요했던 중산층 사회의 확장으로 인해 가능해졌다.
요컨대, 르네상스 이래 이론가들은, 예술 자체가 스스로 지켜야 할 이성적 법칙체계를 가지고 있는 지적 활동으로서, 과학과 같은 엄격한 지적 활동과 함께 '자유로운 기예들'의 체계 안에 든다는 것을 주장해 온 셈이다. 이어서 고대와 근대를 비교하는 신구논쟁을 거치면서 예술은 과학과 구별되는 독자적인 인간 활동이라는 의식이 강화되었다, 이제 이성적 활동에 입각한 인간의 업적이 상상력에 입각한 인간의 업적과 구별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를 살펴볼 필요성이 중대되고, 이에 따라 예술체계의 확립은 물론 학문으로서의 미학의 바탕이 마련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드디어 [하나의 원리로 통일된 여러 기예들]이라는 책이 출판되었는데, 아베샤를르 바뙤는 여기에서 오늘날 우리가 순수예술이라고 말할 때 연상하는 예술유형들을 거의 비슷하게 망라했을 뿐만 아니라, 순수예술을 '아름다운 자연을 모방함으로써 쾌를 생산하는 활동'이라고 정의내리기도 했따. 이 때 ' 아름다운 자연'이란 그 자체로 완전한 대상을 제공함으로써 우리의 정신을 즐겁게 해 주고 흥미 있는 대상을 제공함으로써 심정을 즐겁게 해 주어야 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출처-무용교육의 힘, 김문환, 댄스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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